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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궁궐

인생은소풍.... 2011. 12. 21. 10:00

                                      한국의 궁궐

                                                                                   제29기 박물관특설강좌 화요반

                                                                                  2005년 10월 10일(화) 13:00~14:50

                                                                                  홍 순 미(명지대학교)

 

1. 궁궐 : “왕이 사는 집”


  궁궐이란 무엇인가? 궁궐이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왕이 사는 집”이라 할 수 있다.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왕조국가 조선에서 국왕은 주권자요 통치자였다. 행정부의 수반, 법의 제정자이자 집행자, 군대의 통수권자, 국가의 원수, 백성들의 어버이, 하늘의 대행자로서 어느 누구도 그 권위 앞에 복종해야 하는 성스러운 존재였다.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말 한 마디에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 권력자였다.

 

  그러나 실제에서 국왕은 사족 관료들의 지지와 보필을 받으며 동시에 그들의 견제를 받기도 하였다. 국왕은 법의 규정을 초월하는 존재였지만, 법의 모든 조항이 국왕의 명으로부터 출발하여 국왕에게 보고되고 마무리되었다. 국가의 정책과 시책은 관료제를 통하여 입안되고 집행되었다. 관료제의 핵심에 있는 관료들은 필요할 때마다 국왕과 함께 국정을 협의하고, 집행 결과를 보고하였다. 그들은 유교 이념을 잣대로 하여 국왕에게 성군을 될 것을 요구하였고, 국왕의 공식적인 언행을 항상 공개하기를 요구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기었고, 국왕이 정도를 벗어났다고 판단될 때는 이를 비판하며 심할 때는 국왕을 축출하기도 하였다. 왕권은 사족 관료들과의 관계에 따라 강약의 차이를 보였다.

 

  국왕은 정통성이 있어야 폭넓은 인정과 지지를 받았다. 정통성은 일차적으로 왕위 승계가 정당한가에 따라 좌우되었다. 왕위는 국왕의 적장자가 승계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조선 27명의 국왕 가운데 부왕과 왕비 사이의 맏아들은 여섯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차자이거나 후궁 소생, 왕실 방계 출신이다. 조선후기에는 특히 왕실의 혈통이 미약하여 왕위 승계와 정국의 동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선중기 붕당정치 상황에서 정국의 향방은 붕당 사이의 역학관계에 따라 주로 영향을 받았던 데 비해 조선후기 숙종대 이후 탕평정치 상황에서는 국왕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시기 국왕의 위상은 크게 높아져 정치적 실권만이 아니라 이념의 주도권까지 자임할 정도였다. 정조가 특히 그러하였다. 정조는 이전보다 더 활발하게 궁궐 밖으로 행차하여 위의를 과시하는 한편 일반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호소를 듣고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왕에게 집중되었던 정치권력은 정조 사후 국왕들이 그에 합당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자 급속히 서울의 몇몇 유력한 가문으로 이동하였으니 이를 세도정치라 한다. 세도정치 이후 즉위한 고종은 자신을 압박하는 국내의 정치적 여건과 외세의 침탈을 이겨내려 노력하였으나, 결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국왕은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런 왕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왕도 인간이기에 산다는 것은 우선 먹고, 입고, 자고 하는 일상생활을 뜻한다. 그러나 일반인들도 그렇지만 특히 왕은 산다는 것이 그저 일상생활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왕은 왕조사회에서 주권자요 통치자였다. 그렇다면 왕이 산다는 것은 공적인 활동, 곧 통치행위를 한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결국 궁궐은 왕의 일상생활과 통치행위를 하는 공간이요, 그 가운데 왕이 통치행위를 하는 공간, 다시 말해서 ‘국정의 본산’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왕조사회에서 왕이 사는 도시가 왕도(王都)요, 왕도가 곧 수도(首都)였다. 서울은 궁궐이 있기에 서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왕이 사는 곳인 궁궐은 서울을 서울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2. 서울의 도시구조와 궁궐


* 내사산(內四山) :

  가=백악(白岳)[主山] 가-1=응봉(鷹峯) 나=타락산(酡酪山)[左靑龍]

  다=목멱산(木覓山)[案山] 라=인왕산(仁王山)[右白虎]

* 내수, 외수 : 청계천(淸溪川), 한강(漢江)

* 사대문(四大門)과 종루(鍾樓) :

  ① 숭례문(崇禮門) ③ 돈의문(敦義門) ⑤ 숙정문(肅靖門)

  ⑦ 흥인지문(興仁之門) ⑨ 종루

* 사소문(四小門) :

  ② 소의문(昭義門) ④ 창의문(彰義門, 紫霞門) ⑥ 혜화문(惠化門)

  ⑧ 광희문(光熙門)

* 주요 거리 :

  ⑦~③ 운종가(雲從街) ①~⑨ ‘남대문로’

* 좌묘우사(左廟右社) :

  ㉠ 종묘(宗廟)  ㉡ 사직(社稷)

* 다섯 궁궐(宮闕)

  A 경복궁(景福宮)  B 창덕궁(昌德宮)  C 창경궁(昌慶宮)  D 경희궁(慶熙宮)

 E 경운궁(慶運宮,“德壽宮”)

        

 

3. 궁궐의 역사 : 법궁―이궁의 부침


  서울에는 그러한 궁궐이 모두 합하여 다섯이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그것이다. 서울에는 궁궐이 왜 다섯이나 되는가? 그렇게 된 배경에는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깔려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왕이 궁궐 하나만으로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화재, 전염병, 병란, 혹은 요변(妖變)이나 정치적 파란이 발생하여 더 이상 어느 한 궁궐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생기면 이를 떠나 머물 또 다른 궁궐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에서는 대체로 두 개의 궁궐을 유지 경영하였다. 그중 제1의 공식적인 궁궐을 법궁(法宮)이라 하고 제2의 공식적인 궁궐을 이궁(離宮)이라 하였다. 궁궐 경영 방식은 왕이 필요에 따라 법궁과 이궁을 이어(移御)하는 “양궐체제(兩闕體制)”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법궁은 경복궁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 연결되어 사용되었던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으로 쓰였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서울과 궁궐들을 모두 파괴함으로써 첫 번째 양궐체제는 무너졌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은 경복궁은 버려 두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는 한편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과 경덕궁을 새로 지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대에는 인경궁은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는 데 쓰고 경덕궁은 계속 궁궐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합하여 동궐(東闕)이라 불리면서 법궁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영조대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 경덕궁은 서궐(西闕)로 불리면서 이궁이 되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 생부(生父)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는 방편으로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270여년 만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법궁의 지위를 회복하자 동궐이 이궁이 되었고, 경희궁은 더 이상 왕이 임어(臨御)하지 않는 빈 궁궐이 되었다. 1897년 고종은 일본의 압박을 피하여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였다가 옛 정릉동 행궁 터에 경운궁을 중건하여 환궁함으로써 경운궁이 유일한 황제의 궁으로 되었다. 10년만인 1907년에 고종이 일본의 압박으로 황제위에서 물러나자 일제는 순종을 세워 창덕궁으로 이어케 하고 고종은 경운궁에 머무르게 하여, 경운궁은 물러난 황제가 머무는 궁궐 아닌 궁궐이 되어 이름도 덕수궁이 되었다.

 

4. 궁궐의 짜임새


  궁궐에는 왕만이 아니라 왕실 가족과 그들을 수발 드는 수많은 사람들, 궁궐을 지키는 군인들, 국정의 한 부분을 맡은 관원들이 혹은 상주하며 활동하기도 하고, 혹은 드나들며 근무하기도 하였다. 궁궐은 왕과 왕실가족의 생활공간인 동시에 국가최고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궁궐에는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줄잡아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상주 또는 출입을 하며 활동하였다. 자연히 궁궐은 그에 걸맞는 공간과 건물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건물 규모 역시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고, 또 각 궁궐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경복궁의 경우 가장 많을 때 약 7,000간이 넘었다. 간이란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지는 사각형 공간, 대체로 한 사람이 드러누워 네 활개를 벌렸을 때 조금 여유가 있는 정도의 면적이다. 신분에 따라 건물의 규모를 제한하던 조선왕조에서 최고 신분의 사가에서 지을 수 있는 한계를 흔히 99간으로 잡았던 데 비해 보면 궁궐의 규모는 상당히 큰 것이어서 일개 도시, 그것도 매우 밀도가 높은 도시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많은 건물들은 각각 그 주인이나 시중드는 사람, 또는 드나들며 활동하는 사람에 따라, 또는 그들이 하는 일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으며, 그렇게 구별되는 건물들이 모여 일정한 짜임새를 갖추었다. 궁궐은 지엄한 왕이 사시는 특별한 공간이었으므로 높은 담장으로 외부와 구별되었다. 담장에는 보통 동서남북에 큰 문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문들이 있었다. 여러 문 가운데 원칙적으로는 남쪽 문이, 궁궐에 따라서는 동쪽 문이 정문 구실을 하였다.

  궁궐의 중앙 부분은 왕의 활동공간인 대전과 왕비의 활동공간인 중궁전이 자리잡아 이 둘을 합쳐 내전이라 하였다. 내전의 앞에는 외부에서 들어온 신료들이 국왕을 만나 조회나 연회같은 의식행사를 치루는 공간―외전이 있고, 내전과 외전의 좌우에는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공간인 동궁과 궁궐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관원들의 관청들이 들어서 있는 궐내각사(闕內各司) 공간이 배치되며, 내전의 뒷편에는 왕실 가족 및 이들의 생활을 뒷받침해주는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휴식 및 각종 집회를 할 수 있는 숲과 넓은 평지, 연못과 정자 등으로 이루어진 후원으로 꾸며진다. 적어도 이 정도 짜임새는 갖추어야 궁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궁궐의 공간구조 :


  외전(外殿)-국왕과 신료들이 의식(儀式) 행사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만나공간.

                 중심 건물이 법전(法殿)

  내전(內殿)-국왕과 왕비의 기거, 활동 공간. 국왕의 침전(寢殿)-연거지소(燕居之所),

           왕비의 침전이자 시어소(時御所)-중궁전(中宮殿)

  동궁(東宮)-세자(世子)이 기거, 활동 공간.

  궐내각사(闕內各司)-궁궐에 들어와 근무하는 관원들의 관청 공간.

  궐외각사(闕外各司)-궁궐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궁궐 부근의 관아.

  생활 기거 공간-궁궐에 사는 왕실 및 이들을 수발하는 궁녀, 내시 등의 공간.

  후원(後苑)-휴식, 집회 등을 위한 숲, 공터.



* 5대 궁궐의 주요 건물

궁  궐

法  殿

便  殿

燕居所

王  妃

王大妃

東  宮

正  門

景福宮

勤政殿

思政殿

康寧殿

交泰殿

慈慶殿

繼照堂

光化門

昌德宮

仁政殿

宣政殿

熙政堂

大造殿

 

重熙堂

敦化門

昌慶宮

明政殿

文政殿

歡慶殿

通明殿

慈慶殿

時敏堂

弘化門

慶熙宮

崇政殿

資政殿

隆福殿

會祥殿

長樂殿

興政堂

興化門

慶運宮

中化殿

 

咸寧殿

觀明殿

 

德慶堂

仁化門



* 건물들의 신분 :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누(樓)-정(亭)


궁궐의 주요 건물들은 그 건물의 주 이용자의 신분에 따라 계서적인 품격을 띄며, 그 품격을 반영하는 고유명을 갖고 있다. 이를 정리하여 보면 대체로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누(樓)-정(亭) 순이 된다.

'전’은 왕이나 왕비, 대비 등 최고 신분의 사람이 활동하는 건물로서 대체적으로 크고 화려하다. 사찰에서는 대웅전(大雄殿) 등 불상을 모신 건물,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에 ‘전’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당’은  ‘전’보다 한 격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활동 공간이다. 건물의 이용은 신분에 따라 상한이 정해진다. 이를테면 왕은 ‘전’이나 ‘당’에 기거할 수 있지만, 세자는 ‘전’에는 기거할 수 없다. ‘당’은 규모나 장식의 면에서는 ‘전’에 버금간다.

'합’은 독립 건물인 경우도 있지만 ‘전’이나 ‘당’을 보위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여성이 이용한다. 규모는 ‘전’이나 ‘당’에 비해 작고 장식도 단순하다.

‘각’ 역시 독립 건물인 경우도 있지만 전이나 당을 보위하는 경우가 많다. 2층 건물에서는 1층에는 반드시 ‘각’자가 붙는다.

’는 주로 주거용 또는 학문 창작 활동을 하는 건물에 붙는다.

‘헌’은 재보다 낮은 주거용 건물이거나 혹은 업무용 건물에 붙는다. 마루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는 지면에서 한 길 이상 떨어진 마루방이거나, 2층 건물의 2층을 가리킨다.

’은 휴식, 연회용으로 경치 좋은 곳에 지은 작은 건물이다.



5. 궁궐 그 옛 모습과 현재 모습


  국왕이 임어하던 시절의 궁궐들은 궁중문화의 산실로서 주변 자연 지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국정의 본산으로서 규모와 품격 그리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궁궐은 수많은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어 그 자체 독립된 하나의 작은 도시였다. 궁궐의 개개 건물들은 일반 민가 건물에 비하여 대체적으로 크고 높았다. 특히 주요 건물들은 처마 밑에 단청을 칠하거나 지붕 마루에 취두 용두 잡상 등을 베풀어 벽사(辟邪)의 뜻을 부여하고 장식효과를 거둠으로써 다른 건물들과 구별을 쉽게 하였다. 그 건물들의 내부 구조와 치장 역시 복잡하고 화려하였다.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은 흘러내리는 응봉 산자락을 자연스럽게 이용한 건물의 배치, 절제된 크기와 장식 등 조선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궁궐이었다. 창덕궁이 궐내각사를 비롯한 공적인 구역이 많은 데 비해 창경궁은 생활공간이 넓어 서로 보완하여 크게 하나의 궁궐을 이루었다.

 

서궐―경희궁은 이궁으로서 많은 국왕들이 상당기간 임어하였던 궁궐로서 상당한 규모와 짜임새를 갖추고 있었다. 북궐―경복궁은 처음부터 백악의 품 반듯한 터전에 반듯하게 지은 궁궐이었다. 19세기 중엽에 중건된 경복궁은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전체 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많아졌으며 개별 건물들도 크고 번듯해져 제일 법궁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경운궁은 애초 선조 연간부터 민가들을 묶어 임시 궁궐로 쓴 것이며, 더구나 1897년에는 그 터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이 들어선 상태이기에 궁궐의 공간 구성이 반듯하지 못했다. 전각 건물들도 낮고 담박한 것이 많으며 서양식 건물들도 포함되었다.


  오늘날 서울에 궁궐이 다섯이나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애석하게도 온전한 궁궐은 하나도 없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35년간 압제를 가할 때 궁궐은 그 첫 번째 표적이 되었다.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 왕정의 상징인 궁궐을 철저하게 왜곡하고 파괴하였다. 경복궁에서는 공진회 박람회를 열면서 전각들을 없앴고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에 조선총독부를 지어 본래의 축을 끊고 외부에서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야를 차단하였다. 창덕궁은 순종과 그 일가가 살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일제의 관청이 들어서거나 관광지 비원이 되어 많은 전각들이 사라졌으며, 창경궁은 식물원 동물원이 들어찬 놀이터 창경원으로 전락하였다. 경희궁은 궁역이 절반이상 잘려져 나갔고 일본인 자제들을 교육하는 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전각들도 대부분 헐려 나가 궁궐로서의 면모를 거의 잃어 버렸다. 경운궁도 외곽 구역이 대부분 잘려 나가 중심부만 남았으며 그중에서도 주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졌다.

 

  건물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지금 서울의 궁궐에는 더 이상 왕이 살지 않는다. 왕이 살지 않으니 왕실 가족도, 관원들도, 이들을 시중드는 사람들도, 아무도 살지 않는다. 궁궐은 죽었다. 그러나 궁궐이 죽었다는 말은 외형이 크게 변형되었고,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 궁궐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폐허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비록 죽은 궁궐이지만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 조선시대 정치와 행정,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배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궁궐이 있는 자리 자체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뒷쪽으로 각기 산을 등지고 앞쪽으로 하천―청계천을 마주 대하고 있어 햇볕이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며 물을 쓰고 버리기 쉬운 자리에 건물을 지으면서, 산자락을 마구 깎지 않고 산기슭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지점을 잘 골라 지었다. 건물의 크기가 너무 커서 위압적이며 불편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너무 작아서 초라하지도 않다. 우리 재료를 써서 우리 실정에 맞게 지었고, 내부는 마루와 온돌방을 같이 만들어 사계절 쓰기 편하게 하였으며, 지붕 모양도 날아갈 듯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 마치 우리나라 버선 코나 뒷산의 능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처마 밑 나무들은 푸른 색, 붉은 색, 검은 색, 노란 색, 흰 색 등을 잘 조화시켜 갖가지 문양을 그린 단청으로 장식하여 화려하면서도 자연과 잘 조화되는 장식을 하였다. 사람이 살기에 편하면서도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건축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지금 궁궐에 남아 있는 옛 전각들은 1/10도 못된다. 궁궐은 이렇게 큰 상처를 안고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불가능할 정도이다. 흔히 궁궐은 공원이나 놀이터 유원지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궁궐은 궁궐이다. 아직도 궁궐에는 조선왕조 그 역사와 문화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흔적들이 올올이 남아 있다. 현재 보이는 저것이 원래 모습일까, 원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저곳에서는 누가 어떤 일을 했을까 등등 자꾸 생각을 하면서 보아, 그렇게 잘 볼 수만 있다면 궁궐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건축이나 조경 뿐 아니라 옛날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정치와 행정 등 여러 면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왕조사회에서 서울은 궁궐이 있었기에 서울이었다. 지금도 궁궐은 그 무엇보다도 서울을 서울답게 해주고 있다.

출처 : 나무과자
글쓴이 : 순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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