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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동 화회 마을이란?

인생은소풍.... 2011. 12. 16. 19:43

안동 화회 마을이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 안동하회마을 전경 (자료제공: 안동시)

[뉴스천지=정인선 기자] 풍산 류 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지켜온 안동하회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와 초가(草架) 등 전통 민속마을의 모습을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해 온 가장 한국적인 곳이다.

이에 하회마을은 한국 고유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일환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으며, 1984년 국가지정문화재로는 최초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안동하회마을 보존과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힘쓰고 있는 하회마을보존회 류충하(59, 서애 선생 14대손) 씨. 그는 “안동하회마을은 600여 년간 유교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고, 현재에도 120여 가구가 살아가고 있는 자연부락인 점에서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국제적인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한 유네스코의 비정부기구인 ICOMOS 한국위원회 위원장 이상해 성균관대 교수도 “안동하회마을은 한국의 유교 양반마을이 갖춰야 할 종가, 정자, 서당, 서원, 사당 등의 특성을 잘 갖추면서도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세계문화유산 등재 기준인 보편적 가치, 진정성, 완전성을 만족시킨다”고 설명했다.

또한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 등 불천위제사를 모시는 분이 5명이나 될 정도로 빼어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에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류 회장은 “이런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렇듯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바람은 안동하회마을의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하회마을 진입 1㎞ 전부터 차량 출입금지로 마을까지 걸어가거나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하며, 주차장, 매표소, 관리사무소 등이 마을 밖으로 이전됐다. 이로 인해 하회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마을의 철저한 원형보존을 위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관광객만의 몫은 아니다. 하회마을이 국가의 민속자료로 지정된 이후 주민들은 큰 불편과 제약을 안고 있지만 원형을 보존해야 하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류충하 회장은 “일부 관광객들이 냉장고, 전기밥솥 등을 보고 도시와 다를 것이 없어 불평하는 부분도 있지만 주민들이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조선시대 삶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이해와 배려를 부탁했다.

이어 류 회장은 “주민들의 편의와 전통마을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절충해 한국 고유의 전통 민속마을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류충하 회장은 하회마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외형적 보존만이 아닌 삶과 문화가 공존하며 역사와 전통 먹거리 등에 대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

류 회장은 “하회마을이 한국 고유의 전통마을이요,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전통만 있을 뿐 사람들이 전통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충(忠), 효(孝) 등의 유교적 이념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과 공간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말한다.

이런 현실을 깨고 참된 정신문화의 수도, 한국 고유의 전통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의식변화와 함께 행정기관의 예산과 인력지원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류 회장은 “외형적 원형보존과 그 안에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릴 수 있는 다양한 체험공간을 마련해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고 하회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체험을 통해 무언가 얻고 마음에 담아갈 수 있는 마을로 만들어 갈 것”이라며 포부를 드러냈다.

 

 
 

○ 광덕리

광덕리는 본래 풍산현 지역으로 넓은 둔덕이 있다고 해서 '광덕'이라 불렸다. 고종 32년(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고,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섬동, 형호, 하회동 일부를 병합해서 광덕리가 됐다.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다시 풍천면으로 편입됐다. 이 마을에는 부용대(英賽臺), 겸암정(讓魔훔), 옥연정(玉淵亨) 등이 있다.

 

광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은 저우리. 땅모양이 저울의 추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는 형호(衝湖), 칭율촌(秤票村)이라고 부른다. 저우리 동쪽 마을은 소라니, 솔안, 화천이라 부른다. 저우리의 서쪽 어귀에 느티나무 세그루와 잡목이 있는데, 마을에서는 해마다 이를 대상으로 음력 정월보름 제사를 지낸다. 저우리 서쪽 들은 수박재다. 저우리의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은 안심이라고 불린다.

 

안심의 서쪽 마을은 섬목이고, 북서쪽 마을은 솔미, 송미, 송산이다. 저우리 남쪽 마을은 수루미란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서편 마을은 강비이고 앞들은 강빗들로 일컬어 졌다. 수박재는 저우리의 서쪽에 있는 들이다. 수박재 남쪽에 큰 뚝이 있어서 그 안쪽의 들을 큰 천방들이라고 부른다. 또 큰천방들의 서쪽에 위치한 들은 장탄이라고 일컫는다. 장탄의 남쪽 들은 갯들이라 부른다.

 
 

○ 기산리

기산리는 기산마을은 풍천면 서편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남쪽으로 의성군의 신평면과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낙동강의 남쪽 갯들인 강남평야와 마주하고 있다. 동쪽은 광덕리와 접하고 서쪽은 같은면의 신성리와 예천군 지보면과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 구담 잠수교를 건너면 구담 장터에 닿는다.

 

'기산'이란 이름은 산 모양이 키(箕)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기산지지(箕山之志)는 요 임금 때 허유(許由), 소부(巢父)가 명리를 피(避)하여 기산에서 숨어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절개를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청에 의하여 안동군 풍남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성리와 안심동의 일부가 합쳐져서 기산리에 편입됐다. 이 마을은 옛날에는 잠종(醫種)의 생산지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나 요즘은 하우스 단지로 변모했다.

 

마을 뒷산 모양이 키와 닮았는데 키 아랫쪽이 되는 곳에 논을 일구면서 마을이 가난해져 그 논을 다시 밭으로 바꾸었다는 속설(倚說)이 있다. 기산마을은 치빗솔로도 불리며 앞들은 치맛들, 기산명이다. 치맛들 북서쪽 마을은 섬마이다. 옛날 낙동강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 물줄기가 양쪽으로 흘러 섬마 도촌(島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섬마 앞에 구담나루, 구담도선장이 위치했다. 기산리에서 구담장터로 건너가는 나룻터였다. 지금은 잠수교와 구담대교가 놓여있다.

 
 

○ 신성리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신성마을의 북쪽은 낙동강이 동서로 갈라진다. 구담리 예천군 지보면과 마주하고 있는 동쪽은 기산리와 접해 있다. 서쪽은 예천군의 지보면과 의성군의 신명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야산에 구불구불한 곡천(曲川)이 마을을 관통해서 남북으로 흘러내려 낙동강과 합류한다.

 

본래 풍산현 지역으로 마을의 짜임새가 납신자 모양이라 하여 납성계, 신성포라고 불리웠는데, 고종 32년 1895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안동군 풍산면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기산리의 일부와 용궁군 신하면의 하안한리(下安閒里)를 합쳐 신성리라고 불렀다. 다시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지금의 풍천면에 편입됐다.

 

마을의 앞쪽이 되는 낙동강 남쪽은 강남평야의 서쪽 끝으로 갯들이라서 불리기도 했다.

마을의 가운데 지점이 중마, 서쪽 마을은 새터, 신기(新基)라고 불렸고 그 서쪽에 탑이 있다고 해서 탑마, 탑촌(搭村), 탑지(搭址)라고 하는데 지번은 신성리 972 번지이고 지금은 옛절터의 주춧돌만 남아었다.

 
 

○ 하회리

하회마을의 지형을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낙동강 줄기가 이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룬 형국을 말한다. 강 건너 남쪽에는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의 지맥인 남산(南山)이 있고, 마을 뒤편에는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花山)이 마을 중심부까지 완만하게 뻗어 충효당(忠孝堂)의 뒤뜰에서 멈춘다. 강 북쪽으로는 부용대(芙蓉臺)가 병풍과 같이 둘러앉아, 산천 지형 또한 태극형 연화부수형국을 이룬다. 유성룡(柳成龍) 등 많은 고관들을 배출한 양반고을로, 임진왜란의 피해도 없어 전래된 유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허씨(許氏) 터전에, 안씨(安氏) 문전에, 유씨(柳氏) 배판이라는 말대로 최초의 마을은 허씨들이 일궜다.

 

하회탈 제작자도 허도령이었다고 한다. 화천(花川)의 흐름에 따라 남북 방향의 큰 길이 나 있는데, 이를 경계로 해서 위쪽을 북촌, 아래쪽을 남촌이라고 부른다.

 

북촌의 양진당(養眞堂)과 북촌댁(北村宅), 남촌의 충효당과 남촌댁(南村宅)은 역사와 규모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는 전형적 양반가옥이다. 하회마을 특히 허씨 안씨 류씨가 시대별로 집성촌을 이루면서 시기별로 민속신앙 불교 유교문화가 고스란히 담겨있고, 기독교 문화까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다.

 

출처 : 문화재사랑★수리기술자(기능자) & 준학예사 시험 준비생들 모임
글쓴이 : 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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